버스 안에서 본 한 없이 몽환적었던 꿈같은 로마는
'테르미니역'에 내리자마자 나를 현실로 되돌려놨다.
들이닥친 새벽의 쌀쌀함과 어디서든 거친 언변과 취객이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는 분위기에 부픈 마음이 볼품없이 쪼그라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B와 이 새벽, 무려 로마에 함께 서있다는 황홀함에 잠깐의 새벽 산책을 권했다.
우린 지도도 보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걷다 트인 광장같은 곳에서 발걸음을 점점 멈췄는데 기분이 좀 이상했다.
꼭 이승에 있는게 아닌, 뭐에 홀린 것 같은 그런...
어두침침한 불빛에 의지해 광장 한가운데에 서서 우릴 둘러쌓은 건물들을 한 자리에 서서 빙빙 돌아보다 혹여나 우리 발자국 소리를, 감탄을 내뱉는 말소리를 누가 들을까 싶어 서로에게 붙어 킥킥거렸던 그 새벽을 적어내려가니 몸이 점점 시려진다.
그 날,
우린 새벽 첫 기차를 타고 '살레르노'로 갈 예정이었다.
탑승 시간까진 기차역 맞은편 맥도날드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늦은 저녁식사로 각자 햄버거 세트 하나씩 시키고 앉아있으면 되겠다. 하고 걸어가니 문 앞에 무섭게 생긴 가드가 지키고 있었다.
'친절하지 못 한 시간이긴 하지.' 하고 지나치면서도 가드의 존재 이유가 궁금했는데,
세 시간 뒤쯤 확실히 알았다.
한참 졸음에 취약한 시간에 맞춰 가게 문을 활짝 열고 그가 들어왔다.
그는 한 마리의 야수같이 자는 사람들 찾아 자지 말라고 어깨를 흔들고, 오래 앉아있었다 싶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더 먹지 않을거라면 나가라고 손 짓 했다.
그래 어쩐지 그 불친절한 새벽 앉아 있는 사람들 중 누구하나도 소란을 일으키지 않더라.
그가 돌아다고 나서 우리 자리에도 커피와 파이가 추가로 올려졌지만 반쯤 눈이 감겨 덜덜 떨고 있는 내 어깨를 흔드는 그덕에 우린 보다 일찍 맥도날드를 나와 기차역으로 갔다.
1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를 걷는 동안 벌새의 날개짓만큼 이가 떨렸다.
제발 기차역 실내가 따뜻하길 바라며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큰 공간에 사람의 온기는 고사하고 차디찬 대리석 바닥과 여전히 어두운 새벽, 실내엔 오직 차가움뿐이었다.
내가 정지해도 시간은 흐른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기차역에선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배낭을 깔고 앉아 춥고 지루한 시간에 그대로 방치되는 수밖에 없었다.
이 검은 새벽이 지나야 우리가 기차를 탈 수 있을 텐데, 아침은 왜 이리도 더디게 오는지 배낭 위에 웅크리고 앉아 생각했다. 그리고도 한참을 앉아 멈춰 있었는데 한기만 올라오던 대리석 바닥에서 신발 부딪이는 소리가 차츰차츰 들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가까워진 소리.
곧 온기가 퍼질 소리에 '살았다.' 싶었다.
전광판에 우리가 탈 기차가 도착했다는 알림을 확인하자마자 구겨진 종이를 펴듯 몸을 세워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눈치보지 않고 편히 앉을 수 있는 내 의자에 앉아야 당장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목적지인 '살레르노역' 까지 직행이면 좋겠지만 한 번의 환승을 해야 했기에 첫 번째 기차에 타자 마자 잠든 나 대신 B는 깨어있었다.
그 피곤한 시간을 네가 어떻게 버텼는지 나는 감히 상상도 못 하겠다.
텅 빈 기차의 지루함에도 B는 정신을 차리고 있다가 환승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야 내게 기대 잠이 들었다.
고생했지 정말.
기차가 빠르게 움직였던가? 느리게 달렸던가.
눈을 뜨고 있었지만 자몽했던 내가 정적인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거라곤 멀뚱히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쳐다보는 일뿐이었다.
팔에서 어깨 그리고 얼굴까지 천천히 올라오는 해를 따라 시선을 옮기느라 지나쳤던 새로운 풍경마저도 놓쳤던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또 풍경 대신 새벽 내내 그토록 바라던 해만 바라보고 있을 것 같다.
'여행_편지 > 이탈리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04_이탈리아_아말피는 레몬사탕으로 기억되리 (2) | 2022.08.18 |
---|---|
03_이탈리아_되찾은 여유, 마이오리. (2) | 2022.07.15 |
01_이탈리아_로마로 들어가는 길. (0) | 2022.06.28 |
선배에게_01_이탈리아 (0) | 2022.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