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밤을 지나 모든 곳을 다시 나타나게 한 나는 마이오리 '레지던스 듀 토리' 3층 창 앞에도 있었다.
나타나기 시작하면 존재하는 모든 곳에 닿지 않은 곳이 없는 나는 이미 내가 없던 내내 깜깜하게 식은 바다의 겉 피부를 덥히고, 셀 수 없이 많은 식물들을 매만지며 여러 일을 동시에 하는 중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그 창 앞에 한 줄기가 아닌 다 잡을 수 없는 양으로 모여있던 나는 어떤 귀띔도 없이 생긴 창 뒤의 블라인드 틈을 통과해 마침내 방 안으로 닿았다.
새카만 블랙홀 같이 무의 공간이었던 방은 나의 도착으로 색을 되찾았는데,
반짝이는 파란색 타일 바닥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면은 새하얀색인 원룸으로 부엌, 거실, 침실까지 있는 방 안에 사람 두 명도 있었다.
얼굴에 만족한 웃음을 띄고 나를 찬양하듯 맞이한 1과 이미 감은 눈에 힘주어 더없이 꽉 감고도 하얀 천 아래에서 내 존재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2.
보면 까만 밤 이후 나타나는 나를 유난히 반기지 않는 생명체였다.
강렬하게, 부드럽게, 은근히, 뜨겁게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도 어찌나 까다롭던지 가끔 꼴 보기 싫은 수준까지 닿으면 나는 꽤나 정확한 내 기분의 주기를 늘이고, 줄여 이들 생활을 골탕 먹이는 걸로 털어내곤 했다는 걸 알지 못 할 것이다.
창 앞에 멈춰있던 1번은 몸을 돌려 침대 선반에 놓아 둔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고, 침대 위를 미끄러지듯 무릎으로 걸어 누워있는 2번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나를 거부하며 머리 위로 쓴 하얀 천을 천천히 내려 자신의 귀에 공기같이 가볍게 무어라 속삭인 후 이마, 코, 양 볼, 턱 순으로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그 정도의 세기와 속도는 아니었다) 행동과 같이 머리를 움직여 내려갔다.
그제서야 온몸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켜며 편안한 얼굴을 하고 눈을 뜬 2번은 이네 두 팔로 1번의 등을 꽈악 안고 '좋은 아침' 하고 인사를 건넸다.
내가 없어지면 자고, 나타나면 일어나는 게 뭐가 어려운 거라고 저렇게 도움을 받아야 불평하지 않고 일어나는 걸까.
인간은 정말 이상한 생명체다. 나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지난밤, 조심히 걸었던 길을 따라 조심성 없이 두 팔을 앞 뒤로 휘두르며 걸어내려 가는 A 뒤로 B가 떨어져 걸었다.
긴 팔을 가진 A의 휘적임이 신경 쓰였을 만도 했을 B는 다행히 멀미로 두 눈을 감고 오느라 못 봤던 풍경의 일부에 시선을 완전히 빼앗긴 참이었다.
벼락치기 일정으로 다니는 둘에게 오늘의 공식일정인 '아말피'는 호텔 밖으로 나가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이미 반은 성공한 오늘의 일정에 크게 서두를 필요가 없는 둘은 마을에서 곧바로 선착장을 찾아가기보단 지금 당장 함께 있는 곳을 남기기 위해 사진 찍는 것에 열을 올렸다.
솔직히 A는 아말피에 가는 게 귀찮았다.
도착하면 누구보다 신나게 둘러 볼 사람이지만 당장의 안정과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것에 게으름을 피우는 A는 B에게 아말피에 다녀와서는 피곤해서 마을을 둘러보지 못할 수 있으니 먼저 마을을 돌아다니자며 제안했다.
혹여나 마을을 돌아다니다 둘 모두의 맘에 쏙 드는 카페라도 발견하면 하루 종일 눌러앉을 수도 있을지 몰라? 하는 다른 뜻이 있던 건 아니었다.
아마도?
둘은 어젯밤 걸었던 길을 따라 안쪽으로, 안쪽으로 걸어 밤엔 닫혀있던 상점들과 미처 가지 못 했던 골목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밋밋한 공기에 은근히 풍긴 고소한 냄새를 따라 도착한 빵집에서 조개 모양의 밀푀유같이 얇은 층으로 이뤄진 빵과 커스터드가 들어간 빵 두 가지를 샀고, 빵 모양이 무너질까 손바닥에 올려놓고 조심히 돌아 나온 길 끝에 있는 바닷가 앞 피자가게에 앉아 이른 점심으로 마르게리따를 나눠 먹는별 일 아닌 소소한 행복이 가득 묻은 서로를 마주했다.
그리고 둘은 선착장으로 곧장 걸어갔다.
배로 이동하는 즐거움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구름이 낀 그리 좋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늘없는 배를 타며 바다를 가로지르는 빠른 속도감만 기대했지 바다 위에서 보게 될 새로운 시선으로의 육지 풍경은 꼭 서프라이즈 선물 같았다. 바다를 바라보는 쪽만 되었지 바다에서 바라보는 쪽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 했었으니까.
뭐든 기대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생각한 B는 바람에 헝클어져 시선을 가리는 머리를 넘기며 옆에서 튀는 바닷물을 맞고도 미소가 만연한 A의 모습을 보고 안심했다.
자신만 따라오라며 손 내밀고 데려온 여행 첫 날의 고생을 지워줄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다행히 그 시간이 배 위에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일렁이는 파도에 멀미가 올 수도 있었지만 신나 하는 A를 보며 아말피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말피는 그야말로 관광지였다.
조용한 마이오리와 다르게 이미 선착장과 마을 입구부터 인파들이 가득했다.
그들을 피하며 뒤를 따라가니 대성당 앞 광장에 도착했다. 선착장에서 봐도 시선을 끄는 독특한 문양의 대성당을 가까이서 보니 긴 계단 위, 신비로운 벽 문양과 장식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밖이 이렇게 예쁜데 실내는 얼마나 더? 하고 자연스럽게 호기심이 일었지만 성당 계단부터 그득 한 관광객들에 '저 사람들을 뚫고...?'라는 공통된 생각이 든 둘은 한 번의 눈 마주침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잡고 있던 손을 힘주어 고쳐 잡고 성당을 지나쳤다.
B는 처음 A와 손을 잡았던 날을 떠올렸다.
프랑스 파리였던가? 하고 몽마르뜨 언덕에 갔던 날을 떠올려보니 손이 아니라 팔짱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덕을 오르는 길에 억지로 팔찌를 채우는 사람들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자신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A는 도착 직전까지 그들을 피하는 방법을 생각했다고 했다.
언덕 앞에서 숨을 크게 쉰 A는 ‘잠시만요’하고 B에게 바짝 붙어 공기도 지나갈 틈이 없이 팔짱을 꼈었다.
겁도, 걱정도 많은 사람이네. 하고 B는 생각했었다.
그날 밤이었던가?
숙소에서 몽파르나스역까지 가는 길을 익혀두기 위해 나온 김에 야경 보러 에펠탑에 다녀왔던 시간.
잠깐 야경만 보고 오려다 에펠탑을 오르는 대회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보고 서있었다. 쌀쌀하던 3월의 밤, 새파랗게 차가워진 자신의 손을 A가 잡았던 것 같다.
'손이 왜 이렇게 차요.'
하며 잡은 손을 자신의 외투 주머니에 넣고 한참을 말이다.
성인 4명이 같이 서지 못 하는 길 양쪽에 즐비한 기념품 상점의 상품만큼이나 많은 사람들과 걸음 맞춰 구경하는 관광을 원하는 사람은 존재하는가.
어느 유명 관광지든 마찬가지겠지만 한참 활동하는 시간대(특히, 날씨 좋은 날)에는 마음 편하게 관광할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항상 도착지에 발을 딛자마자 짧은 한숨과 함께 역시... 하고 속마음을 뱉게 되는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이유는 인간이 망각의 동물여서 일까? 하는 자질구레한 생각마저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말피는 혼잡했다.
물론, 그 혼잡함이 둘에게 별일은 아니었다.
여기, 이곳을 서로와 함께 왔다는 사실이 이미 큰 일이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함께 있다는 것에 의미를 크게 두는 것이 어느곳에서든 '관광'하는 일을 게으르게 만드는 걸림돌이 될 거라는 사실을 지금도 앞으로도 모르게 될 거라는게 별 일이라면 별 일이랄까?
해서 둘은 아담하고 활기넘치는 메인 거리를 수박 겉핥듯 지나치며 보는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단지, 상대에게 쓰고 싶은 신경을 타인에게(덜 닿고, 덜 부딪이기 위해) 써야하는 상황이피곤하고 재미없다 느껴질 뿐이었다.
몇 걸음 안 가 A와 B는 걸음을 멈추고 바로 옆에 있는 기념품가게에 들어갔다.
원하는 상품을 본 건 아니었고, 거리보다 인구포화도가 적은 상점에서 느긋하게 구경하는게 훨씬 나을거란 생각이었다.
해서 들어간 상점은 평범한 관광지의 기념품상점이었지만 그 안에서 한결 여유로워진 둘이 요목조목 상품들을 즐겁게 살펴보자 상점 직원이 그들 옆으로 지역특상품인 레몬사탕이 가득 든 바구니를 다가왔다.
뭐지? 하고 동그란 눈을 한 둘과 시선을 마주한 직원은 웃으며 '캔디?'하며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낯선 친절함에 소심하게 두개씩 집어든 둘에게 직원은 더 가져가가도 괜찮다며 한 번 더 바구니를 가까이 건냈다.
직원이 떠나자 둘은 손에 쥔 레몬 사탕 하나를 까 입에 넣었다.
까만밤 바다 앞에서 터뜨리는 폭죽이 눈 앞에서 터지듯 A의 눈이 반짝였다. 그 동안 먹은 레몬맛 사탕은 가짜였구나! 하는 느낌표 백개의 상큼함과 신선한 사탕에 A는 B의 손을 이끌고 세 군데의 다른 기념품상점을 들어갔다 나왔다.
들고 간 파란색의 힙색 반이 레몬사탕으로 채워져서야 둘은 기념품길거리를 빠져나갔다.
처음 맛 봤지만 벌써 중독 된 레몬사탕덕에 아말피 메인거리 너머 더 이상 걸어 갈 수 없는 길의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상의 색은 메인거리에 내어준듯 길 끝으로 갈수록 동네는 바위같은 단색으로 바뀌었다. 오히려 그 모습이 단정하고 차분해보이는게 둘에겐 안정감을 주었다.
A는 아말피에서 할 일을 다 끝낸 기분에 고개를 돌려 B와 마주했다.
언제 잃었는지 표정없는 얼굴과 두 눈 가득 찬 피곤한 B는 자신의 얼굴과 다를바 없다고 생각했다.
A는 B에게 돌아가자고 말했다.
마이오리까지 걸어 가보기로 한 둘은 천천히 아말피에서 멀어져갔다.
지도도 볼 필요 없이 차도를 따라 걷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배로 40분이 걸렸으니 걸음으론 두 배 그보다 더 걸릴 일이었지만, A는 사람 없는 길을 마음껏 걸으며 아말피에서의 답답함을 털어내고 싶었다. 그리고 B는 그냥 A의 말을 따라주고 싶었다.
걷다 힘들면 버스를 타자. 하고 단순한 계획을 세우고 가볍게 걷기 시작했다.
인도를 만들 공간도 없이 좁은 일차선 도로뿐인 차도위엔 도로를 통제하는 것도 아닌데 아주 드믈게 차가 지나쳤다. 심심한 도로 위를 걷는 둘의 시선 오른쪽으로 탁 트인 파란 바다가 지평선 저 너머 하늘과 맞닿은 곳까지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고 왼쪽으론 가파른 돌산 아래 층층이 심어져 있는 레몬 나무들과 산의 곡선을 따라 자리잡은 집들의 목가적 풍경이 있어 둘은 지루하지 않았다. 그 꾸준한 풍경은 한 줄로 서서 걷는 둘이 각자가 앞에서 걸을 땐온전히 자기것으로 풍경을 바라볼 수 있게했고, 뒤에 서서는 서로의 뒷모습마저 풍경이 된 시선에 일렁이는 감정과 함께 떠올리게 된 '어떻게 우리가...?' 하는 여행 전체의 과정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그 시간을 되돌려 보는 걸 마치고도 한참을 걸어 둘은 무사히 마이오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
하고 내 시선이 아닌 타시점으로 이 여행을 적어보고싶었다.
네가 어땠을지 궁금했고, 조금이라도 알고싶었다.
근데 내가 경험 한 일을 신도 아닌 내가 신처럼 내려다보며 너의 생각 행동을 만들어 적어내려가려 하니 내가 나와 충돌하게 돼 너무 오래 걸리더라.
너는 아니었을 느낌, 감정을 내가 그렇다고 적어내려가는게 너무 이상했지.
음.
그랬다.
하지만, 마이오리는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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