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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_편지/이탈리아

03_이탈리아_되찾은 여유, 마이오리.

by 죠죠디 2022.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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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르모역에 천천히 멈춰 선 기차는 반 계절을 뛰어넘어 초여름 안으로 우리를 내려주었다.



불과 몇 시간전까지 참을 수 없는 추위에 떨며 간절히 원했던 온기 가득한 곳에 놓여지다니, 기차가 나의 소망과 함께 달린 걸까?
덕분에 새벽 내내 마른 오징어 같이 구겨진 몸을 쭉 펴고 내릴 수 있었다.




그날, 날씨가 정말 좋았다.

구름 하나 없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눈이 부시게 내리쬐는 태양 그리고 바닷가 특유의 짠내와 끈적함이 뭍은 공기 내음까지 꼭 '바캉스', '여름방학'에 걸맞은 날씨였다.
사진으로 봤어도 충분히 느껴졌을 그 분위기 안에 배낭까지 메고 서 있자니 꿈꿨던 휴가지에 막 도착한 느낌이 들었다.






너는 어떤 기분으로 도착했을까.


너도 처음이었을 장소가 궁금할만도 했을 텐데 너는 감상보다 현실파악이 먼저였다. 우리가 예약한 호텔이 있는 '마이오리'까지 타고 갈 버스, 정류장, 시간표들의 정보를 얻고 나서야 B는 내게 날씨가 좋다고 말했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한 번에 두 가지가 가능한 사람이라 B의 손을 이끌고 앞서 나갔던 지난 여행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충분히 감상할 수 있었는데, 한 번에 하나씩 해야 하는 B가 내게 자신만 믿고 따라오라며 책임진 이 여행의 의미가 자신보다 나를 위한 여행이었다는 걸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정말이지… 시간이 지나 떠올리는 기억에 이렇게 애틋함뿐이면 그땐 도저히 어쩔 줄 모르겠다.





역을 빠져나온 B와 나는 바다내음을 따라 걸었다.
여유로운 시간, 사람 없을 건물들 사이사이를 누빌 수도 있었지만 당시의 컨디션으로는 자칫 잘못든 골목길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계속 걸어 나가기엔 역부족이었다.


대신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풍경으로 탁트인 시야와 자연, 자연이 힘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무작정 파란 하늘이 보이는 길을 따라 걷다 그 길의 끝, 바로 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는 카페 야외 테라스에 배낭을 내려놨다.


밖에서도 실내가 훤히 다 보이는 통유리로 된 카페는 두 개의 출입문마저도 활짝 열어뒀었는데, 더없이 손님을 반긴다는 뜻으로 자체 해석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갔다.


-뭐 마실래?
-에스프레소.



B는 이탈리아에 가면 꼭 에스프레소를 마셔봐야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마신 것과 전혀 다른 맛이라는 말에 (J 또한 꼭 와인과 커피를 마셔보라고 했었다.) 기대감 가득 안고 주문한 에스프레소를 B와 함께 살레르모, 야외 테라스의 하얀 천막 아래, 바다를 앞에 두고 한 모금 마셨던 그때,



더 이상 뭔가를 할 필요 없겠구나했다.
뭐랄까 오늘 하루의 퍼즐이 다 맞춰진 느낌.





간간히 부는 바람마저 누군가 살살 밀어주듯 조심히 불었던 오후였다.



이미 한참 전에 마른 커피 자국이 선명한 잔을 앞에 두고도 우리는 넘치도록 만족한 기분에 취해 한 없이 늘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구 충족되는 희열에 도무지 그곳을 떠나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꽤 오랫동안 언제 일어나야 할까 고민하며 이대로 오늘 하루가 이대로 정지돼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B도 나와 같았는지 숙소에 들어가면 물이 필요할 테니까 슈퍼에 미리 들러야 한다고, 마이오리에서 돌아오는 날에는 시간이 없어 지금 돌아봐야 한다는 갖은 이유들을 대며 테이블을 정리했다.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희열이 마구 충족되는 순간을 벗어나게 하는 게 나 자신이라는 게.





나와 B는 바다를 뒤로 하고 건물 사이, 골목들을 돌아다녔다.


슈퍼에 들러 물과 약간의 간식을 사고 나와 (나의 과거이자 미래의 모습인) 평일 낮 현지인들의 삶을 지나치는데, 어쩐지 슬픈 기분이 들어 B에게 서둘러 마이오리에 가자고 했다.

보통 때 같으면 시덥잖은 농담처럼 여행자인 나의 신분을 일상을 사는 현지인들과 비교하며 여행하는 즐거움에 더했겠지만 스스로 넘치도록 만족을 느낀 그 카페를 벗어난 이후, 결국 이번 여행이 끝나고 내가 나를 또 쳇바퀴 도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겠구나란 생각에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니 서둘러 시선으로부터라도 멀어져야겠다란 생각이었다.

여행자들 가득한 관광지로 가 다시 여행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이 여행의 즐거움을 되찾아야겠다고 말이다.
(마음이 불편해서였을까? 시간 들여 오래 걸어 다녔던 살레르모 시내의 기억이 제일 흐릿하다.)




버스 시간에 맞춰 갔다간 서서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추천하지 않는다는 친절한 블로거의 글은 별표 다섯 개를 줘도 아깝지 않은 정보였다.


비포장 도로의 끝이었던 '마날리'에서 '레'로 가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서서 가기엔 충분히 고되었을 구불구불한 도로에서 B는 심한 멀미가 왔고 내겐 꿈 같이 느끼게 했던 창 밖의 예쁜 풍경을 두고 억지로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그 옆에서 내가 당장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곤 손을 잡아주는 일뿐이라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등을 쓸어내리듯 B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나는 B가 멀미로 놓쳐버린풍경들이 아쉬워 버스에서 내려 세세히 설명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냥감을 쫓듯 끈질기게 창 밖 풍경을 쫓던 일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당시 내 기분, 표정, 하고 있던 행동, 버스 안의 소음과 덜컹거림이 여전히 선명한데 당일에도 그 이후에도 B와 공유하지 못했다.
그때 우린,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는 것은 고사하고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것들을 나누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던 때였으니까.







버스정류장에 내리니 눈 앞에 바다가 있었다.


까만 조약돌이 모래사장처럼 펼쳐진 바다는 처음이라 새로운 곳, 처음 보는 바다에 설레었을 수도 있었는데 멀미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B의 상태를 걱정하다 불편해진 마음에 나 또한 기분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웃기게도 갑자기 변한 기분이 불편하다기보단 너의 컨디션과 비슷하게 맞췄다는 묘한 생각에 오히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바다를 감상했다.




그 후, 체크인 시간에 맞춰 호텔로 갔다.

잠깐만 쉬고 다시 나오자는 말을 지키기엔 긴긴 새벽을 밖에서 버틴일을 쉽게 털어낼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고, 따뜻한 물로 개운하게 씻고 나온 후 밀려드는 안도감에 잠깐 누운 침대에서 깨고 보니 바로 앞도 보이지 않은 새카만 밤이었다.


손을 더듬어 킨 스탠드를 통해 본 퉁퉁 부운 서로의 얼굴에 터진 웃음을 비타민 삼아 밤 산책을 나갔다.
기념비적인 첫 날을 잠자는 걸로만 쉽게 흘려보낼 수 없었다.
고요뿐이 호텔을 살금살금 걸어 밖으로 나가니 눈앞에 파랗게 펼쳐졌던 바다마저 소리로만 볼 수 있었다. 새카만 배경지 같은 바다를 오른쪽에 두고 도로의 노란 가로등을 따라 마을로 내려가니 이미 마을 대부분의 상점들은 문을 닫아 인기척도 구경거리도 없었지만,

세상에 오직 우리 둘 뿐인 것 같은 상황이 오히려 내겐 특별하게 남게 되었다.

다행히 아직 열려있는 기념품 가게를 발견해 서둘러둘러보고 나오니 엄청난 사이즈의 레몬들이 나무 박스에 담겨있었다. 레몬이 특산물이라더니 달라도 뭔가 다르구나 싶어 떠나기 전에 특산품을 사 가자는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유령처럼 돌아다닌 그 밤,




낮 보다 높아진 습기에 끈적했던 밤공기가 어쩐지 장마철인 오늘의 공기와 비슷해 그 밤 어딘가에 서 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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