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귤이 있는 제주에 다녀왔다.
너의 독립이 부러웠는데 지역마저 제주라니 올해 부러워할 대상은 단연 너다.
지난 12월의 제주 여행에 가져간 캐리어가 집과 공항을 오갈 때 이용한 대중교통에서 아주 불편했기에 배낭 메고 가야겠다고 다짐했는데, 겨울 여행에 배낭이라니 어림없지.
두터운 상의 두 개만 넣었을 뿐인데 배낭 밖에 있는 짐들은 전완근을 이용해 꾸겨 넣어도 모두 함께일 수 없는 게 확실했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큰 방에 있는 캐리어를 꺼냈다.
날씨는 춥고, 공항까지는 버스로 환승 1번.
집에서 나오자마자 드르륵 거리며 구르는 바퀴 소리에 배낭을 멘 나를 상상했다.
못 가지고 가는 짐들은 포기했어도 괜찮았을지도?!
환승버스가 이동경로의 70%였기에 일부러 앉아가고자 애매한 시간에 맞춰 환승정류장에 온 건데 타는 사람도,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도 가득이었다. 캐리어가 도망 다니지 못하게 다리 사이에 꼬옥 껴두고 간편하게 에코백만 메고 있는 나를 생각했다.
다음번엔 금귤네 미리 짐을 보내고 제주엔 맨몸으로 가야지.
공항에서 만나기로 한 해동이보다 일찍 도착한 나는 먼저 짐을 보내고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인생의 절반을 함께하다 보니 기다려서 함께 하고, 옆자리에 꼭꼭 앉아야 하는 일들에 집착은 전혀 없는 사이.
공항으로 오는 내내 기력이 쇠해 사람 많은 게이트 앞 대신 공항 내 편의점 옆 한산한 의자에 앉아있었다.
비행기 오가는 풍경 너머 해가 지는 걸 보고 있었는데 눈의 힘이 빠지더니 매직아이 보는 눈으로 초점이 흐려졌다.
아마도 영혼 없는 눈이었을 게 확실한 내 뒤로 곧 해동이가 도착했다.
활기찬 그녀는 짐을 놓고 '물'을산다며 편의점에 가더니 곧 내게 하나도 둘도 아닌 세 개의 초코과자를 보여주더니 세일했다며 흥분된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알려줘서 고맙지만 너어는 오랫동안 주치의에게 커피와 초콜릿 섭취를 주의하라는 말을 듣고 있었고 약도 먹는 중이었는데...? 아니... 야아..!하고 잔소리를 하려다 마주친 몹시도 반짝이는 눈과 표정에 입술을 물었다.
그래, 약 처방받아왔잖아? 좋아하는 거도 먹고 약도 먹으면 되지 뭐.
기내로 들어와 내 앞자리에 앉은 해동이의 뒷모습을 본 후 잠이 들었다. 보통 비행기를 타면 이륙 직전에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가 10분 뒤면 깨어나곤 했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제주 공항에 곧 도착한다는 기내방송이 나오는 중이었고 비행기의 바퀴가 지면에 닿아 흔들려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기내에선 안전벨트 해제 사인이 울리기도 전에 철컥! 하며 여기저기서 벨트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나 또한 자연스럽게 벨트를 풀고 일어나기 전 잠깐 옷을 정리한다고 숙인 고개를 드니 이미 복도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정신이 조금만 일찍 들었다면 나도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었을 테다.
비행기 밖으로 나가며 다시 만난 해동이는 한숨도 못 잤다며 너는 정말 잘 자더라? 하고 말했다. 나는 죽은 듯이 잤다고 자랑?하며, 아직 완전히 깨지 못해 몽롱한 나와 잠 못 이룬 피곤함에 약간 지친 너의 기분이 왜인지 얼추 비슷한 상태로 제주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다시 캐리어와 마주할 시간.
무려 퇴근하고 마중 나온 금귤이 기다리고 있어 캐리어가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컨베이어 벨트 위로 정말 빨리 나온 캐리어가 조금은 반가웠다. 아주 조금.
생각해 보니 처음이었다. 누군가 마중 나온 곳으로 여행 온 게 말이다. 그게 무슨 느낌인지 몰랐는데, 숱하게 온 제주공항의 입국장 앞에서 우릴 반기는 금귤을 보며 여행이 아닌 너를 만나러 왔다는 생각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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