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여행 중 처음으로 숙면을 취했어.
방을 오롯이 혼자 쓰고 그 안에 화장실이 있다는 게 이렇게나 안정을 주는 일이었다니?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아침,
창밖으로 청명한 날씨에 얼른 준비하고 호텔 측이 엘리베이터에 안내한 4.5km 조깅코스를 따라 산책을 갔어.(아마 2월 16일에 구마모토 마라톤이 있어서 준비한 듯?)
산책코스는 호텔 뒷 길을 따라 구마모토 성을 지나는 코스였고 역시나 여기도 쿠마몬이 존재했다.
잘 만든 지역캐릭터 하나가 지역을 먹여 살린다 = 쿠마몬이라 생각하는데 직접 와서 보니 그 이상으로 이곳은 쿠마몬의 도시 구마모토라고 느낄 정도로 온통 쿠마몬이 없는 곳이 없어.
역시, 귀여운 게 최고고 세상을 지배하는 거지.



이번 여행에 들고 온 책이 아야 고다의 나무여서 그런지 자꾸 크고 묵직한 나무들이 눈에 들어오고 이들의 입장을 떠올리게 됐어.
여기, 구마모토 성이 있는 공원(?)에 거대한 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이전 같으면 그냥 와 크네 하고 지나갔을 텐데, 오늘은 괜히 걸음을 멈추고 다가가 줄기에 손을 대고 얼마나 오래 이곳에서 있었는지, 어떤 시간을 기억할까? 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았어.
더욱 오래 건강히 살아있어 주길 바라며 구마모토 성을 뒤로하고 진짜 오늘의 첫 스케줄을 소화하러 갑니다.



까마귀... 가 내 스케줄이 아니라 핀이 나가 흐릿하지만 누가 봐도 거의 다 먹어가는 녹차소프트아이스크림이 오늘 내 첫 계획이었어.
연일 최고, 최장의 한파(그래봤자 체감온도 -5)라며 일본뉴스에서 방송되는 2월이었지만 오늘보다 내일이 더 춥다는 예보에 무조건 오늘뿐이었거든. 근데 진짜 날이 차긴 차서 가게에 아이스크림 사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상점가를 통틀어 봐도 먹는 사람 또한 나뿐이었지.
그래서 같이 먹을 동료로 까마귀 급하게 섭외했다.
(녹차소프트는 정말 맛있었어요. 추웠지만 원래 아이스크림은 추울 때 먹어야 제맛이니까)


까마귀에게 콘 1/3을 나눠주고 끝낸 조깅코스 후, 전차를 올라타 구마모토역으로 가.
사쿠라마치에서 구마모토역까지는 이제 지도 없이 걸을 수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도입 중인 터치리스시스템에 1일 최대 300엔이라는 이벤트를 맘껏 이용해 줘야 돈을 쓰지만 이게 또 돈을 버는 느낌이 드니까.
이래야 뭔가 현명한 소비를 하는 여행객느낌이 나서 기분이 조크든여.


어제도 왔지만 별 일없이 돌아갔던 곳을 굳이 다시 찾은 이유는 단 하나.
히트텍.
아무리 최고 추위라고 말하지만 여기, 일본겨울의 체감온도 -5 정도는 들고 온 옷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기에 오늘, 내일은 필요 없었지만 문제는 당장 내일 돌아갈 한국의 온도였어.
체감온도가 -20라는 보고도 꿈같은 숫자에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지. 도대체 -20도가 무슨 온도람...
그래서 유니클로 들어가자마자 그냥 아니고 울트라 히트텍 아주 짱짱한 애들로 위아래 세트로 바구니에 담고 추가로 엄마 아빠 꺼까지 구매해서 나오는데 아직 겪지도 않은 추위를 이겨낸 느낌이었지.
그래서 히트텍만 사고 끝낼 스케줄에 신이 나서 마트 4곳이나 돌다 피곤해져서 숙소로 들어갔어.
원랜 어제 먹은 소금빵집을 가기로 했고, 가야만 했는데 다음날_화요일로 미뤘다가 영영 안녕이 돼버렸지. 왜냐면 화요일은 빵집의 유일한 휴무일이었기 때문에...^^


그나저나 왜 인지는 몰라도 후쿠오카보다 구마모토가 물가가 더 쌀 거라고 생각했는데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비쌌어.
오히려 이 두 도시의 중간에 있는 구루메가 진짜 저렴하고 여행객이 아닌 주민들을 위한 상품위주로 팔고 있었는데 이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공항도 국내선이 국외선보다 더 잘 돼있는 게 일본인데 현지인 >>>> 여행객인 구루메가 물가가 싸겠지 그치?
그래서 나는 다음에 후쿠오카 간다면 금-토에는 무조건 구루메 가서 숙박비와 쇼핑비를 아껴볼 참이야.
이렇게 벌써 다음을 계획해 봅니다.




숙소에서 한 숨자고 일어나 저녁을 먹으러 대장정을 떠나.
근데 메뉴는 또 '마파두부'.
구마모토에 머무는 중 식당에서 식사한 게 딱 2번인데 메뉴가 다 마파두부라는 게... 나도 좀 그렇긴 한데 오늘은 뭐랄까 전날의 마파두부의 부족했던 2%를 찾기 위한 재도전 느낌이랄까?

매번 숙소에서 나와 걷던 사쿠라마치쪽이 아닌 그 반대편 쪽 길을 따라 걸어야 하는 곳에 있는 작은 가게였는데 도시 중심부에서 멀어지니 마치 여행객이 찾아올 리 만무한 우리 동네 같은 게 더 정겹고 낯선 풍경이 신기해 걷다 보니 나름 금방 가게 근처에 도착했지. 근데 어쩐지 익숙한 공원풍경에 여기 혹시 하며 확인하니 아침에 산책했던 구마모토성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곳이었더라고?
연어처럼 크게 한 바퀴 돌아 아침에 왔던 곳으로 돌아왔네



시간대가 마침 해질녘이라 선명하게 터지는 오렌지색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식당으로 들어갔어. 주변에 식당이 몰려있는 것도 아니고 덜렁 여기 식당 하나만 놓여있어 여행객은 없겠는걸? 하며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공간 동네 할머니 두 분이서 식사 중이셨지.
그 외 손님은 나뿐이라 테이블석에 앉아 메뉴판 대충 읽는 둥 마는 둥 하다 마파두부 주문하는데 종업원이 0-5로 맵기 선택하라고 해서 기본이겠거니 하고 3을 선택했거든? 근데 0단계도 꽤 맵다며 내게 한 번 더 선택할 기회를 주는 거 있지?
그치만 그동안 매운 음식이라며 오버해서 붉은색으로 고추와 불을 그려 광고했던 일본음식에 속을 대로 속은 나는 그건 일본인을 위한 단계고! 나는 한국인! 하고 당당하게 손가락을 펼쳐 3단계를 표시했지. 그리고 받아 든 연한 색의 마파두부에 그럼 그렇지 했다.

수저로 크게 한 술 떠서 마파두부만 입에 넣는데 아직 목으로 안 넘어갔는데 배 아프기 있어요?
횽아, 일본식 중화요릿집이 아니라 그냥 중화요리집이었어.
아무래도 중화요리 앞에 사천을 빼놓은 거 같은데 여하튼, 색도 옅은 마파두부에서의 마-함과 얼얼함은 한국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찌릿함이었지. 마파두부 주변에 있는 다섯 가지의 음식이 없었다면 마파두부를 얼마나 먹을 수 있었을까 싶어.
아마 반의 반도 못 먹고 미안함인지 매워서인지 붉어진 얼굴로 서둘러 식당을 나와야 했을 거야.

내가 원한 일본식의 자극적이고 입에 달라붙는듯한 찐득한 마파두부의 맛은 후쿠오카 후톤라멘집에만 있는 거라는 걸 깨달으며 다신 그 맛을 찾기 위해 타 도시에서 마파두부를 도전하지 않기로 다짐하며 먹어보지도 않은 마하고 얼럴한 마파두부의 1단계 맛을 그리워하며 식사를 마쳤어.
그나저나 오늘같이 춥고, 어두운 때에 딱인 메뉴였다. 정말.
매콤했던 마지막 밤을 지나 맞이한 청량한 구마모토의 아침.

잠들기 전, 느닷없이 꽂힌 세븐일레븐 나폴리탄에 일어나자마자 호텔 1층 세븐일레븐에 갔다가 빈 손으로 호텔방으로 돌아가며 오늘 오전 내 꿈은 나폴리탄 헌터로 명명했어.
호텔 뒤편에 있는 세븐일레븐을 다음으로 돌고 돌다 결국 시모토리아케이드까지 가서 눈에 보이는 세븐일레븐이란 세븐일레븐은 죄 들어가 봤지만 아침시간엔 나폴리탄이 많지 않거나 거의 없으니 전날 저녁에 사라는 글을 현실로 마주할 뿐이었어.
이렇게까지…열정적으로 찾아다닐정도로 내가 나폴리탄을 좋아했다고? 하며 현타가 살짝 왔고, 그냥 킷사텐 가서 먹고 들어갈까? 라며 호텔로 가는 길 다이소 맞은편에 있는 세븐일레븐을 마지막으로 없으면 포기하자며 가면 역시나 뭐든 있는 매직.

이건 세븐일레븐께 맛있는 게 아니라 이걸 찾아다닌 내 노력이 더해 맛있을 수밖에 없는 식사였다고 생각해 난. (이걸로는 성에 안 찼는지 집에 돌아와서 며칠을 나폴리탄만 해 먹음)
호텔 체크아웃 하고 리무진까지는 한 3시간 30분 정도 시간이 남아서 어제 마파두부 먹으러 가는 길에 마음 홀딱 뺏긴 장소에 한 번 더 들러 오전의 모습을 담아두고 지난번 후쿠오카에서 사간 스누피 책의 다른 년도버전을 사려고 서점을 몇 군데 들렀지만 실패하고 츠타야서점 스타벅에서 가서 커피를 마셨지.
실은 와이파이 쓰러 일부러 스타벅스 찾아간 건데 (왜냐면 하루용으로 사둔 esim을 한국에서처럼 전날 미리 설치하는 잘못을 저질렀기에... 핸드폰이 먹통이었음) 츠타야 스타벅스에선 와이파이가 아예 안 잡혀서 그냥 커피 마시러 간 사람이 돼서 일기도 쓰고, 아야 고다 책도 읽고 경건하게 구마모토에서의 마무리 시간을 보냈지. 의도치 못 한 시간이긴 했지만 강제로 디톡스 할 수 있어서 좋았어.


그리고 1시 30분? 인가 츠루야백화점 맞은편에서 공항리무진을 타고 구마모토 공항으로 가면서 무료 와이파이 쓸 생각에 아주 많이 들떴다고 할까?
구마모토 공항 와이파이는 개인 정보를 입력해야 쓸 수 있었는데 이 또한 당연히 데이터가 터져야 가능한 일이었고 출국장 들어오기 전, 공항에 있는 카페 무료와이파이를 잡아 쓰던 나는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그대로 출국장 들어와 버렸잖아.
덕분에 메모장, 시계 그리고 mp3용으로만 사용 가능한 핸드폰 대신 스타벅스의 연장선으로 일기와 책에 집중하며 힘겹게 고다아야의 나무를 다 읽을 수 있었고 출국장에 있는 그 누구보다 귀국을 원했다고 한다.

많은 걸 하진 않았지만 내겐 알차고 적당히 지루했던 후쿠오카보다 여유롭고 시대감이 느껴지는 구마모토에서의 3박 4일이었어.
아마 언젠가 다시 한 번 구마모토를 찾는다면 그건 소금빵이 8할, 쿠마몬과 전차가 1할일거야. 소금빵맛이 아주 엄청 선명하게 혀를 스치는 어느날 다시 구마모토 비행기표를 찾을텐데 그게 언제가 될런지 쿠마몬처럼 깜깜하기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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