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은 완벽하지 않았지.
날씨는 궂었고, 이동수단을 계속 고민했고, 무엇보다 약속시간 4시라는 시간이 불안했으니까.
(집에서 머문 시간이 길수록 외출하고자 하는 욕망은 반비례하니까.)
실로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그것도 주로 가던 방향이 아닌 공항갈때나 타는 반대 방향의 지하철을 타니 문이 닫히는 순간부터 두근거리고 말았다. 공항으로 가던 그 기억 때문은 아니었고_이젠 그 설레임에 대한 기대도 기억도 안 든다_ 글쎄, 그냥 좋았던 것 같다.
만나기로 한 역까지의 적당히 거리감 있는 이동 후의 환승이 좋았고,
내린 곳이 처음 가본 곳이라는 것도 좋았고, 개찰구를 빠져나가기 위해 오르는 계단 맨 앞쪽에 횽이의 뒷모습을 발견한 건 신나게 좋았다.
둘 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돌돌 말아 정리를 하며 역을 올랐다.
물을 하나 사고, 다이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렸다. 혼자서 왔다면 이렇게 내가 여유롭지 않았을 텐데 횽이 덕분에 여유롭게 버스를 탔다.
나는 맨 앞자리, 횽이는 중간자리 각자 앉아 할 일을 하며 또 긴긴 이동을 했다.
지하철을 타고 왔던 시간만큼 아니 그보다 더 시간을 써서 하차 후 바다가 보일 때까지 같이 걸었다. 눈앞에 보이는 사실을 뱉기만 해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주중, 흐린 날씨에도 바다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 있어 사실 나는 좀 놀랐다.
그런 내 옆에서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무덤덤한 횽이와 적당한 곳에 돗자리를 폈다. 주섬주섬 각자의 가방에서 서로에게 주려고 챙겨 온 간식들과 편지들을 주고받았다. 우리가 뭔가를 주고받으려고 만나는 건 아니지만 만날 때마다 항상 그렇지.
바다수영 후 마시려 산 흑맥주를 텀블러에 와인을 담아와 앉자마자 마셔버린 내게 맞추느라 횽이는 수영 전에 맥주를 땄다.
그러고 보니 우리 돗자리 주변에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었다. 뭔가 바라는 눈빛이었지만 줄 거라곤 물뿐이었지. 그래서 그랬나? 고양이는 우리 돗자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모래를 파더니 실례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더라.
그리고 갈매기들이 걸어왔다.
우리가 자리 잡고 나서 거의 떠날 때까지 곁에서 떠나지 않던 갈매기가 있었다. 그 녀석을 보며 전생에 어떤 인연이 있는 거 아니냐며 웃었는데 집에 돌아오고 이틀이 지난 지금에도 생각나는 거 보면 진짜 뭐가 있나 싶기도 하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말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우리는 'THE PAPER KITES'의 노래를 틀어두고 한 모금 술을 마시고 바다를 보았다.
나도 도입부터 좋았는데, 횽이도 몇 초 듣더니 곧바로 누구 노래냐며 물었다.
힘겹게 힘겹게 바다에 들어간 횽이,
우산을 펴두고 쉽게 돗자리에 누운 나.
누워서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언제 잠든지도 모르고 단잠을 자버렸다. 흐린 날씨에 부는 바닷바람이 너무 완벽했다. 뭐, 와인에 오른 취기도 빼먹을 수 없겠지...?
그야말로 완벽한 바캉스가 아니었는지, 아니 그랬다.
노을까지 보고 왔다면 더 좋았을 수도 있겠지만 욕심부리지 말아야지.
노을은 다음에 가서 보고 오면 되니까.
그땐 저녁식사 한 그곳에서 김밥도 포장해서 가자.
비가 올 수도 있니까 나도 우비를 챙겨가야지.
그때도 같은 지하철을 우연히 타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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